Sound Horizon의 노래 '돌계단의 붉은 악마'를 모티브로 해서 썼지만 개인적으로 설정을 바꾼 부분도 있습니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어딘가의 AU가 되어버렸지만 【The sealed aqua blue】 ⇔ 【The liberated ruby red】가 아이카네적으로 생각했을 때 너무 좋았습니다.
작은 돌이 맨발을 할퀴었다. 이미 긁힌 상처 위에 새로 붉은 줄이 그어졌다. 고우시는 눈을 찌푸렸다. 이미 상처투성이인 온 몸이 아팠다. 내내 뛰어다닌 다리가 한없이 무거웠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타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등에 박힌 화살이 움직일 때마다 몸을 후벼 팠다. 그러나 그는 내달리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겨우 마지막 단이었다. 기나긴 계단이 끝났다. 고우시는 그제야 발을 멈추었다. 입술을 찢는 것 같은 들숨을 크게, 목을 찢는 것 같은 날숨을 깊이. 걸음 뒤로 흩뿌려지던 피는 몸을 타고 흘러내려 발 옆에 고였다. 쇳내가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고우시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화려한 얼굴에는 기묘한 무늬가 장식처럼 자리 잡았고 커다란 뿔 아래로 긴 물빛 머리카락은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졌다. 돌 벽에서 돋아난 듯 가슴 아래는 벽에 묻힌 채였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고요한 감옥에서 푸른 불꽃과 흔들리는 그림자만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어이.”
불러보아도 남자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긴 물빛 머리카락만이 푸른 불꽃에 비쳐 일렁거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빛을 보고 있자면 이곳이 깊은 감옥이 아니라 어딘가의 물속인 것 같았다. 조용하고 아름답고, 손으로 휘저어 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이미 죽었냐?”
고우시는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이래도 답이 없으면 한 대 쳐 볼 생각이었다. 주먹을 쥔 손이 무색하게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마주친 눈동자도 옅은 물빛이었다. 끝이 내려간 눈이 고우시를 담고는 살짝 휘어졌다.
“손은 내려둬. 성격이 너무 급한 거 아냐?”
멀끔한 얼굴에 걸맞은 미성이었다. ‘악마’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악마일지도 모르겠다. 고우시는 주먹을 더 꽉 말아 쥐었다.
“네가 악마냐.”
“믿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맞아. 내가 악마야. 무엇을 원해? 네가 미워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릴까? 아니면 네 손을 빠져나간 모든 것들을 네게 돌려다줄까?”
“…….”
고우시가 대답하지 않으니 줄줄 이어지던 말도 멈추었다. 악마가 늘어놓는 말은 허무맹랑했지만 물빛 눈에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 만한 마력이 감돌았다. 고우시는 악마에게 다가갔다. 감옥에는 발소리와 맺힌 피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고요히 울렸다.
“네 불꽃을 줘.”
눈동자의 떨림마저 볼 수 있을 거리였다. 악마는 빙긋이 웃었다. 고우시는 거리낌 없이 악마를 노려보았다.
“너, 이름이 뭐야?”
“이름은 왜.”
“이름을 알아야 계약을 하지. 부르기도 쉽고.”
“카네시로 고우시.”
악마가 입을 움직였다. 소리 없이 고우시의 이름을 읊조리던 악마는 고우시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실없이 웃는 건 아무래도 성격인 모양이다.
“영원은 독이나 다름없어. 고우시, 같이 독을 마실 각오는 되었어?
“이미 예전에 했어.”
“빠르네. …자, 나와 함께 살아가겠다면 맹세의 입맞춤을.”
“…하나하나 귀찮게 하네.”
고우시는 혀를 찼다. 악마는 아직 벽에 붙들려 있었다. 고우시는 성큼 악마에게 다가섰다. 발돋움을 해 목을 끌어안았다. 눈이 마주치고 물빛 머리카락이 고우시의 품안으로 쏟아졌다. 천천히 입술이 닿았다. 생각보다 차가웠고 예상보다 부드러웠다. 고우시는 눈을 감았다. 품을 간질이던 머리카락의 감촉이 사라지고 마주 안아 오는 팔이 느껴졌다. 고우시는 자신 안에 휘몰아치는 힘을 느꼈다.
입술이 떨어졌다. 벽에 갇혀있던 악마는 바닥에 내려서 제 발로 서 있었다. 발돋움을 해야 했던 높이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고우시는 여전히 악마를 올려다보아야 했고 악마는 고우시를 내려다보며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흐응.”
악마는 고우시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간만에 만난 인간이 신기하기라도 한가. 고우시는 간지러운 손을 쳐냈다. 악마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어딘지 낯간지러운 얼굴이었다. 웃지 말라고 말할까 하다 지시할 이름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고우시는 악마의 눈을 마주보았다.
“너, 이름이 뭐야.”
“……잊어버렸어. 고우시가 지어줄래?”
잠깐의 침묵 후에 당황스러운 요구가 따라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자기 이름을 잊어버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악마는 착잡한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아직 알지 못하는 시간들만큼의 사연이 있노라 떠벌리는 얼굴이었다. 지금의 고우시에게는 알 바 아닌 영역이었다. 고우시는 악마를 마주보았다. 이름을 지어달라니, 갑자기 들어서야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요구였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물빛 눈도 부담스럽기만 했다.
“……아.”
“아?”
하지만 입은 저도 모르는 새 움직였다. 물빛 눈이 휘어졌다. 주술 같은 순간이었다. 악마의 얼굴을 보니 문득 떠오른 이름이었다. 고우시는 제 입에서 나오는 누군가의 이름을 들었다.
“아이조메.”
“이름은?”
“……켄토.”
“좋은 이름이네. 고마워, 고우시.”
악마는 웃었다. 정말로, 이름을 그대로 풀어놓은 것 같은 미소였다.
생경한 기분으로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푸른 불꽃이 몸을 휘감았다. 타오르는 불꽃은 짧았던 입맞춤과도 비슷했다. 놀랄 만큼 차가웠고 그럼에도 다정한. 불꽃은 고우시의 옷을 태우고 몸을 할퀴며 차례차례 깃들어 푸른 불꽃이 일렁거리는 검은 옷을 짜냈다. 몸에 새로운 힘이 깃들었음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화살에 맞은 상처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 고우시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바닥 안에서 작은 불꽃이 일렁거렸다.
“계약은 성립했어. 이제 나는 고우시, 너의 악마. 너의 불꽃이 되었으니.”
새삼 거창한 말이었다. 켄토가 손을 뻗어 고우시의 뺨을 만졌다. 큰 손에서는 푸른 불꽃이 넘실대고 있었으나 뜨겁지는 않았다. 악마의 모든 것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차갑고 어딘지 다정한. 켄토는 천천히 고우시에게 다가왔다.
“같은 독을 마시자. 같이 영원하자. …그리고 같이 불타버리자.”
“……흥.”
숨이 섞일 거리에서 악마는 말했다. 고우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웃음만을 남겨둔 채 고우시는 악마에게 다가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